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 (문단 편집) === [[쿠데타]]로 쫓겨나다 === 물론 나라를 더 이상 망칠 수도 없을 수준으로 망친 독재자는 얼마 안 가 아주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1979년]] 6월 중순에 국가보안부 소속 장교 6명이 응게마가 상주하던 몽고모로 이동해[* 전술했듯 응게마가 중앙은행 역할을 겸임(?)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수개월째 밀린 입금 체납을 시정할 것을 요구하자 그는 경호원들을 동원해 급료를 요구한 장교들을 모두 총살시켰다. 이들 중에는 '''응게마의 조카'''도 있었는데, 이 사건으로 막내동생을 잃은 방위군 대장 [[테오도로 오비앙 응게마 음바소고]]는 그에 대한 충성심을 접고 [[쿠데타]]를 획책하기 시작한다. 오비앙은 삼촌을 호위한다는 명목으로 군인들을 보내 삼촌을 암살하거나 체포할 계획이었으나, 오비앙이 보낸 중위가 투옥된 그의 형제에게 그 계획을 밀고했고, 그 형제는 감옥에서 쿠데타 음모 소문을 알렸다. 이것을 안 응게마는 격분하여 [[6월 16일]]에 그들의 형제와 부모를 처형하라는 지시도 내려 공식적으로는 '종신 대통령에 대한 음모 및 암살미수'로 선포된 사건으로 100여명이 살해당했다. 이 사건 직후 마시아스 응게마는 오비앙 응게마를 만난 후 조카에 대한 심문을 주관하며 그를 반역자라고 질책했다. 이후 오비앙은 조용히 있다가 [[1979년]] 7월 말부터 쿠데타를 재계획했고[* 사실 하필이면 오비앙이 쿠데타를 계획한 것은 오비앙이 마시아스의 최측근이었기 때문에 타인이 마시아스를 축출시키면 오비앙도 군대나 대중에게 보복당할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는 뒷이야기가 있다.], 1979년 [[8월 5일]]에 쿠데타를 일으키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계획이 유출되자 오비앙은 '더 이상 물러날 수 없다'며 일정을 앞당겼고, 결국 1979년 [[8월 3일]], 적도 기니를 도탄에 빠트린 희대의 독재자의 몰락이 시작되었다. 마시아스 응게마는 전보를 통해 '국가를 이끌 수 없다는 이유'로 '해고'당했다는 것을 통지받았고, 이 전보에 경악한 응게마는 다음날에 가봉에 쿠데타를 진압해 달라는 군사적 도움을 요청하지만, 당연히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79년]] [[8월 3일]] 밤 8시에 [[적도 기니]]의 국영 라디오 방송국에서 마시아스 정권의 전복 소식이 공표되고 새 정부가 공포한 일련의 법령이 선포되었다. 쿠데타 과정에서 [[쿠바]]와 [[중국]]의 지원을 받은 응게마측과 쿠데타측이 전투를 해 12명이 사망하는 유혈사태가 벌어졌다. 마시아스 응게마는 정글로 도피하기 전에 별장 내 교도소에 있던 30여명의 죄수들을 손수 처형하고 자신이 보유하고 있던 [[화폐]] 대부분을 불태운 이후 400만 [[미국 달러|달러]] 정도의 현금과 [[마약]]이 가득 든 2개의 여행가방을 들고 [[카메룬]]으로 도피하려고 했는데, 이 과정에서 응게마는 중국의 지원을 받은 300명 정도의 추종자들을 이끌고 쿠데타군에 저항하려고 했다. 이들은 [[최후의 발악]]으로 응게마의 숙청과 생포 등으로 겨우 40명 정도만 남았는데도 지나가는 마을마다 약탈하고 불을 지르며 여성, 어린이들이라도 봐주지 않은 채 400여명의 민간인을 살해했지만, 남아있는 부하들도 모두 생포되거나 사살당해 응게마는 홀로 남게 되었다. 응게마를 몰아낸 쿠데타군들은 응게마의 동상들을 모두 파괴하고 모든 정치범과 망명자들을 사면했으며, [[스페인]]의 지원을 받으며 응게마 시기에 완전히 파괴된 성당들과 학교들, 여러 인프라들을 복구하며 응게마의 상흔들을 지워나갔다. [[1979년]] [[8월 21일]]에는 적도 기니의 국기와 국장이 현행으로 변경되었으며, 4일 뒤에는 PUNT가 해산되고는 헌법도 독립 당시 헌법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9월 14일 적도 기니는 [[대한민국]]과 수교했다. 11년간의 지옥과도 같은 학정에 시달린 적도 기니 국민들은 응게마가 쫓겨나자 이날을 기다렸다는 듯이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고 거리를 행진하면서 여당의 본부와 사무실들을 습격했고, 응게마의 조각상들을 모조리 부쉈으며, 응게마의 초상화들은 보이는 즉시 모두 총검으로 찢거나 불태웠고, 당연히 쿠데타군은 열광적인 환호를 받았다. 그리고 응게마의 학정 때문에 고국을 등지고 떠날 수밖에 없었던 망명자들은 응게마의 공개처형을 요구하기도 했다. [[https://www.britishpathe.com/asset/199273/|쿠데타 직후 적도 기니 국민들의 반응]] 1979년 8월 18일, 한 할머니가 가봉 국경 인근에 있는 나무 아래에서 홀로 정신없이 [[사탕수수]]를 먹는 응게마를 발견하였고, 그는 이내 쿠데타군 병사가 쏜 총에 왼쪽 팔뚝을 맞고 붙잡히게 되었다. 응게마의 곁에는 상술한 여행 가방과 총알이 없는 리볼버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